2025.12.04
영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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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죽은 건 순식간이었다. 늘 따뜻한 미소로 이진홍을 안아 주곤 하던 피터가 죽은 건 순식간이었다. 누구보다 따뜻한 색감을 가진 피터가. 이진홍과 꼭 닮은 눈으로 이진홍을 사랑해 마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곤 했던 그 피터 파커가.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날씨가 포근해서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기대하던 이진홍의 눈이 까맣게 죽어가고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돈을 아끼고 아껴 유명 파티쉐의 케이크를 예약했으니 픽업해오겠다는 말과 함께 피터는 영영 닿지 않게 되었다.


다녀올게. 응, 보고 싶으니까 빨리 와. 하는 시시한 몇 마디가 마지막 인사로 전락하고, 포근하게 감싸 주던 바람은 누군가를 상처 입히겠다는 듯 매섭게 몰아친다. 세상은 그 애가 죽은 것을 알지도 못할 텐데 하루 아침에 꼭 이진홍이 모르는 것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피터.


두 사람의 온기가 미미하게 남은 침대가 이진홍을 거부하겠다는 듯 갑갑하다. 피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피터, 내일 크리스마스야. 누구도 이유를 밝혀 주지 않는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히로인 뿐이었다. 살면서 숱하게 들어온 권선징악 이야기들이 우스워졌다. 이진홍은 자조했다. 나도 너를 지키지 못했는데.


일주일 동안 이진홍은 머리를 잘랐다. 이진홍은 웃지 않았고, 이진홍은 울지 않았고, 이진홍은 머리를 잘랐고, 이진홍은 전보다 자주 담배를 피웠고, 이진홍은 죽은 눈을 했고, 이진홍은.


이진홍의 삶의 주어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우리로 시작하던 모든 문장이 이진홍만의 것으로 귀결된다. 죽음은 나의 문장에서 너를 지우는 것. 죽음은 이다지도 시시한 것. 네 이름을 부르면 꽃이라도 피울 듯 간질거리던 심장이 흘리지 못한 눈물 잠겨 죽어 버린 것만 같다.


피터. 그 애의 손이 닿았던 궤적을 따라 온몸이 욱신거린다. 환상통인지 알 수 없다. 사실 이렇게라도 네가 내 곁에 있는 건 아닐까 착각하고 싶은 걸지도 몰라. 이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사랑이라.


고향을 떠나온 이방인이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피터. 지나치게 넓은 침대가 서글프다. 껑충 짧아진 이진홍의 뒷머리까지 방 안의 모든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세상이 온통 잿빛 같다. 이진홍은 아직도 죽음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 수 없다.


창밖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창밖에는 형형색색 빛나는 것들이 있다. 창밖에는 네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이 있다. 창밖에는 너의 죽음을 방관하던 사람들이 있다. 거울에는 너의 죽음을 방관한 사람이 있다. 거울에는 아직도 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지난주에 함께 부르던 캐롤이 창문 새로 밀려들어온다.


You are my home, my home for all seasons
So come on let’s go
Let’s go below zero and hide from the sun
I love you forever where we’ll have some fun
Yes, let’s hit the North Pole and live happily
Please don’t cry no tears now it’s Christmas baby…


신이 태어났다는 그 크리스마스에 왜 또 다른 영웅은 죽어야만 했는지. 이진홍은 세상을 모르고, 세상을 지키는 영웅은 누구도 지켜 주지 않고, 어쩌면 신은 영웅을 사랑하지 않고…….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어둠 속에 까맣게 먹혀 들어가는 그 애의 히로인을 방관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