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5
Forget Me Not

지인분께서 써주신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기억의 나선 속을 헤매다 눈을 뜨면, 서슬 퍼런 뉴욕의 현실이 어김없이 그를 맞이했다. 삐걱거리는 낡은 창틀 사이로 스며든 한기가 비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고독감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밀려들 때면 피터 파커는 습관처럼 밖으로 나섰다. 온 우주를 통틀어 자신이 온전히 자신일 수 있는 유일한 그곳으로.

희뿌연 겨울 햇살이 낮게 깔린 공동묘지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피터는 거뭇하게 색이 바랜 돌판 앞에 무릎을 꿇고, 비석에 들러붙은 흙먼지를 쓸어내고 엉겨 붙은 마른 풀을 뽑아냈다. 손끝이 곱아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만이 떠나간 그녀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사랑이었으므로.

“···메이. 그 애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어요. 기억하죠? 참 많이 예뻐하셨잖아요.”

피터는 차가운 석재 위에 새겨진 이름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얼음장 같은 돌의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심장 언저리를 시리게 파고들었다.

“사실은요, 메이. 어쩌면 그 애가 아주 멀리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저 아득한 바다 건너에서는 분명 날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단지 너무 멀리 있어서 만날 수 없는 것뿐이라고······ 그런 비겁하고 속 편한 생각을 남몰래 해왔거든요. 하하. 하지만 메이, 역시 그럴 리 없죠.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심지어, 그 애마저도.”

툭, 체념하듯 떨어진 고개 너머로 마른 한숨이 바스라져 흩어졌다. 공중에 볼품없이 퍼지는 입김이 꼭 갈 곳을 잃은 제 처량한 신세 같았다.

“죄송해요. 오랜만에 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이런 푸념뿐이라. ······사랑해요. 그리고 많이 보고 싶어요, 메이.”

지키기 위해 지워지는 편을 택했건만, 홀로 남겨진 삶은 폭우를 잔뜩 들이켠 외투처럼 무겁고 축축했다. 입술이 부르터지도록 깨물며 눈가를 훔치는데, 등 뒤의 메마른 잔디 위로 사각거리는 발소리가 아스라이 번져왔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대도시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조심스럽고도 느긋한 걸음걸이.

천천히 몸을 돌린 피터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진홍이었다. 새하얀 국화 한 다발을 품에 안은 그녀가 묘지 한복판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홍의 시선이 피터의 발치로, 그 뒤의 비석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메이 파커] 그리고 제 앞에 서 있는,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옆집 남자. 그 이름, 피터 파커. ‘파커’라는 성이 흔했던가? 진홍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가, 이내 다시금 펴졌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소중히 쥔 국화를 묘비 앞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진홍은 메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세상에서 지워진 것은 오직 '피터 파커' 뿐이었기에, 그들이 나누었던 시간이 실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말마다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문지방, 메이가 정성스레 싸주던 도시락. 그리고 그 모든 추억의 중심에 함께 있었던 ■■■■.

“파커 씨. 여기서 또 보네요.”

바람을 타고 흘러든 진홍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러게요.”
“이분이랑······ 아는 사이셨어요?”

피터는 대답을 바로 잇지 못했다. 목구멍이 뜨거운 모래를 한 움큼 삼킨 것처럼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겨우 이성을 붙들고 아주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어쩌다 보니. 아주 좋은 분이셨어요. 참 다정하고.”
“맞아요. 저도 고등학생 때 신세를 많이 졌거든요. 정말 좋았는데······ 사정이 있어서 뉴욕을 떠나는 바람에 오늘에야 와봤네요.”

어머니와 남동생의 블립, 그로 인해 뒤숭숭했던 집안, 결국 쫓기듯 뉴욕을 떠야 했던 귀국길. 피터가 차마 다 알지 못하는 진홍의 무거웠던 지난 세월이 짧은 문장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저도 비슷해요.”

분명 거짓말이었다. 그는 매주 이곳에 와 꽃을 새로 두고 숙모의 비석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홍과 나란히 서기를 바랐다. 그 마음이 진홍의 과거에 대한 연민인지, 제 현재에 대한 동정인지, 피터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잘 계시죠, 그쵸?”

진홍이 비석을 향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칼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그녀의 짧아진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하늘 높이 묶고 있던 긴 머리칼을 잘라내고, 어른의 무게를 온 어깨로 짊어진 채 서 있는 스물셋의 진홍.

“그럴 거예요. 분명.”

메이, 당신이 이 애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아요. 마치 딸처럼! 그래서인지, 이 애는 아직도 당신을 기억하며 이렇게 찾아왔어요. 메이,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보고 싶었다던가, 잘 지냈냐던가, 하다못해··· 피임은 꼭 하라는 농담이라도요. 메이, 나는 여전히 열아홉이고, 메이도 그 나이 그대로인데, 이 애는 어느새 스물셋의 어른이 되었네요.

“같이 내려가실래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피터는 간신히 감정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스산한 묘지 길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 진홍은 힐끗 피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울음을 참느라 붉게 달아오른 남자의 눈가가, 얼마 전 어두운 골목에서 저를 구해주고 묵묵히 집까지 데려다준 붉은 영웅의 실루엣과 자꾸만 겹쳐 보였다. 이윽고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진홍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피터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저기, 파커 씨.”
“네?”
“우리······ 정말 초면인가요?”

진홍의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의문과 기시감이 서려 있었다. 피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우리가 나눈 시간들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제발 나를 기억해 달라고 그렇게 울부짖고 싶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타적인 영웅은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피터는 옅게 웃으며 끝내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처음 봤잖아요, 우리. 이사 오신 날에.”

담담하게 뱉어낸 거짓말이 허공으로 가볍게 흩뿌려졌다. 진홍은 그 대답이 못내 만족스럽지 못한 듯, 그러나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다는 것 또한 아는 듯 씁쓸하게 웃으며 반대편 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렇구나. 그럼, 먼저 가볼게요. 다음에 봬요, 파커 씨.”
“네, 조심히 들어가요.”

피터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진홍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지고, 마른 구두 굽 소리마저 겨울바람 도는 소리에 묻혀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열여섯의 기억 속에 머무를 수 없는 너의 스물셋을, 그리고 자신을 감쪽같이 지워버린 이 무정한 도시를, 그는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할 것이다. 뉴욕의 겨울바람이 두 사람의 흔적을 쓸어내리며 지나쳐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혹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Our Summer > 판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Way Back Home  (0) 2026.08.04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0) 2026.07.02
Winter in Queens  (0) 2026.04.01
네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0) 2026.04.01
내가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0) 2026.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