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지인분께서 써주신 글입니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이역만리 낯선 땅, ‘조셀린’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새롭게 시작한 뉴욕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잔무에 시달려 늘 늦은 시간까지 야근하기 일쑤였고, 이웃집 남자 피터 파커 역시 제 나름의 짐을 짊어지느라 밤낮없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인지 얇은 벽 하나를 두고 살면서도, 두 사람의 동선은 좀처럼 겹칠 일이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끝없는 업무에 짓눌려 허리케인처럼 밀려오는 피로를 겨우겨우 추스르며 퇴근길에 올랐을 때였다. 이미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 인근 상가 어디에도 사람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새벽. 찬 바람이 부는 거리에 택시마저 잡히지 않자, 조셀린은 무섭고 으스스하지만 가장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는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또각,
닥,
또각,
닥.
그녀의 발소리와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박한 발소리가 뒤를 쫓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몸에 핏기가 싹 가셨다. 걸음을 재촉할수록 뒤따르는 발걸음도 급해졌고, 공포에 질린 그녀가 울먹이며 뜀박질을 치던 그 순간, 붉고 푸른 색채가 칠흑 같은 골목의 하늘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스파이더맨이었다. 잔뜩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조셀린을 향해 그는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고, 아파트 문 앞까지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조셀린이 늦은 야근을 할 때면 어김없이 스파이더맨이 나타나 근처 골목을 지키고 서 있거나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게끔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친절한 이웃의 존재는, 삭막하기 짝이 없던 뉴욕에 조그마한 유대감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평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도 사방이 캄캄하게 잠긴 시각,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홀로 퇴근길에 올랐을 때였다. 고요해야 할 블록 너머에서 갑자기 요란한 경적과 함께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인근 은행에서 비상벨이 시끄럽게 울려댔고, 무사히 은행을 빠져나온 강도 무리가 거리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엎드려요!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대피하는 인파에 떠밀려 비틀거리던 찰나, 둔탁한 충격이 조셀린의 복부를 꿰뚫었다. 툭, … 두둑. 바닥으로 쏟아지는 피는 뜨거웠고, 시야는 속수무책으로 하얗게 바래져 갔다. 정신을 잃어가며 마주한 마지막 모습은, 매캐한 화약 냄새와 붉은 피가 번져가는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그리고 차갑게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 이 참혹한 비극의 현장 한가운데로, 피터 파커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든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제발, 제발……!”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이가 다름 아닌 조셀린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그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불과 30분 전 드울프 반장과 나누었던 통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현장으로 향하려던 피터에게, 드울프는 그 정도 사건은 경찰에 맡겨두라며 웃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하면 더 빠르다며 귓등으로도 안 들었겠지만, 이날은 어쩐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게, 은행 강도를 잡으러 가버리면 야근하는 조셀린의 퇴근길을 제 손으로 지켜줄 수 없었으니까. 피터에게 그녀의 말은 꽤 달가웠고, 기분 좋은 핑계였다. 내가, 내가 만약 곧장 은행으로 달려갔더라면…… 후회와 자책이 밀려들었지만, 지금은 자책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떨리는 두 팔로 조셀린의 차가운 몸을 품에 안아 들었다. 주변의 수많은 시선과 아우성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그녀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피터는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려서 가까운 응급실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혼비백산한 채 환자를 밀어 넣은 수술실 앞. 그녀를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는, 그리고 그녀마저 잃을 수 없다는 살얼음판 같은 긴장 속에서 피터는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의료진이 다급하게 보호자를 찾으며 환자의 인적 사항을 묻자,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이름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무심코 건네받은 차트에 자기도 모르게 적어버렸다.
‘Jinhong Lee.’
그렇게 그해 겨울, 돌아온 뉴욕의 어느 병원 응급실에서 조셀린이 마주한 서류 한 장은 그녀의 세계에 던져진 작은 감자¹)와도 같았다.
환자 인적 사항을 적는 란. 그곳에는 삐뚤빼뚤하지만 꾹꾹 눌러쓴 흔적이 역력한 글씨로 ‘Jinhong Lee.’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시감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번졌다. 미국 땅 그 어디에도, 서류상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오직 조셀린만이 아는 이름. 이 거대하고 무정한 도시에 그녀의 본명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어야 마땅했다.
“……저기, 파커 씨. 내 이름… 대체 어떻게 안 거예요?”
떨림을 간신히 억누른 채 뱉어낸 추궁에 피터는 벼락이라도 맞은 고목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사시나무 떨리듯 요동치는 동공, 금방이라도 왈칵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이 일그러진 얼굴. 그가 갈 곳 잃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애처롭게 변명거리를 찾던 찰나, 주머니 속 휴대폰이 정신없이 울려댔다. 인근에서 범죄가 발생했다는 알람. 그것을 확인한 피터는 마치 벼랑 끝에서 동아줄이라도 붙잡은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급,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해요! 미안해요!”
도망치듯 멀어지는 낡은 운동화 소리가 병실 밖으로 아스라이 흩어졌다. 홀로 남겨진 조셀린은 서류 위에 남겨진 잉크 자국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물어보지 못한 말들이 혀끝을 맴돌았으나, 결국 그녀는 그날의 의문을 목구멍 너머로 삼켜내야만 했다.
당혹감을 남긴 뒷모습은 길고 긴 뉴욕의 겨울밤 속으로 눈송이처럼 서서히 녹아내렸다.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 어느덧 4년이 지났고, 기묘했던 그날의 일은 바쁘고 삭막한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조금씩 마모되어 갔다. 하지만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조셀린의 일상 한구석에 남아 이따금 묘한 잡음처럼 맴돌았다.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얇은 벽 하나를 맞댄 이웃집 남자가 유난히 부산을 떨어대는 탓에, 그 감각은 더욱 짙어졌다. 어떤 날은 밤이 이슥해지도록²) 누군가와 통화라도 하는 건지 웅얼거리는 대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또 어떤 날은 무언가를 부수고 조립하는 듯한 둔탁한 마찰음이 아파트의 낡은 뼈대를 타고 고스란히 넘어왔다.
문 앞에 두고 가세요. 조잡하게 뜯어낸 종이 쪼가리에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메모. 그리고 언제 배달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만큼 차갑게 식어 문 앞에 방치된 배달 음식. 출퇴근길, 수명이 다해가는 노란 백열등이 위태롭게 깜빡이는 복도에서 그 초라한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조셀린은 가만히 걸음을 멈추곤 했다. 나도 참 퍽퍽하게 살지만, 저 남자도 어지간히 고단하고 구차하게 사는구나. 벽 너머의 그는 마치 세상과 완벽히 단절된 외딴섬 같았다.
가끔 복도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칠 때면 가볍게 목례를 나누었지만, 조셀린은 단 한 번도 4년 전 그날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손끝이라도 스치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텅 비어 있던, 가늠할 수조차 없이 애처롭고 가없이³) 슬퍼 보였던 눈빛. 어쩌면 조셀린은, 그 이면에 웅크리고 있을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고요하고 삭막했던 그녀의 일상에 또 한 번의 파문이 일어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적막이 싫어 습관처럼 틀어둔 TV에서 앵커의 다급한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스파이더맨이 위독하다는 긴급 속보였다. 뉴욕 시민들은 그가 입원했다는 병원, 공교롭게도 4년 전 그녀가 생사를 오가며 누워있던 바로 그 병원 앞으로 구름 떼처럼 몰려가 촛불을 켜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염원의 불빛을 가만히 응시하며, 조셀린은 칠흑 같던 골목길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붉은 영웅을 떠올렸다. 부디 미디어 속에 나오는 불멸의 영웅들처럼 그가 보란 듯 일어나, 다시 이 도시의 하늘을 비상하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스파이더맨의 생사가 초각을 다투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된 직후부터, 그토록 소란스럽던 이웃집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똑똑. 문을 두드려 보아도 돌아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얇은 판자문에 가만히 귀를 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방음이라고는 쥐뿔도 안 되는 허름한 아파트라면 당연히 들려야 할 얕은 숨소리나 삐걱거리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날 저녁, 조셀린은 퇴근길에 샌드위치를 두 개 샀다. 하나는 자신의 몫, 남은 하나는 이웃집 남자 피터 파커를 위한 것이었다. 조심스레 그의 문고리에 비닐봉지를 걸어두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샌드위치는 그 자리에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어느새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와 봉투를 휘어맨 흔적, 그리고 부패해 가는 음식 냄새에 말고 몰려들어 윙윙거리는 파리. 결국 삼 일째 되던 날, 문고리에 매달린 비닐봉지를 제 손으로 거둬들이던 조셀린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이질감에 몸을 잘게 떨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스파이더맨이 위독해진 시점에 맞춰 감쪽같이 이웃집 남자가 증발하다니. 기막힌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섬뜩할 정도로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래, 어쩌면. 막연했던 의심의 조각들이 어느새 윤곽을 띠고 있었다.
뭐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엉켜버린 실타래의 끝을 찾아내야만 비로소 숨을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4년 전, 서류 위에 아무도 알지 못 하는 자신의 이름을 남겼던 진료 기록이라도 다시 떼어본다면 이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핑계에 가까운 충동에 떠밀려 조셀린은 홀린 사람처럼 아파트를 나섰고, 맹렬하게 병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당도한 병원 앞 거리는 기적을 맞이한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고 벅찬 얼굴로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스파이더맨의 이름을 미친 듯이 연호했다. 환희의 파도 속에서 무심코 고개를 든 조셀린의 시선 끝, 저 높은 병실 창문 너머로 붉은 복면을 쓴 자가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팔을 흔드는 모습이 들어왔다. 무사히 회복했구나.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려던 찰나였다. 깊은 안도감이 자리 잡기도 전에,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불쑥 찾아왔다.
‘……저렇게 컸었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안아 올렸던 스파이더맨은 성인 남자치고는 조금 작고, 날렵한 체구였다. 창문 너머에서 과장된 몸짓 으로 손을 흔드는 저 거대한 실루엣과는 확연히 달랐다. 짙은 의문에 사로잡혀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인파의 물결을 거슬러 걷던 순간이었다.
“앗.”
누군가의 단단한 어깨와 부딪치며 조셀린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죄송합니ᅳ”
황급히 사과를 건네며 고개를 돌린 찰나, 좁아진 시야 안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며칠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이웃집 남자였다. 그의 파리한 안색 위로는 긁히고 찢긴 지 얼마 안 된 듯한 붉은 생채기들이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무엇보다 조셀린의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만든 것은 그의 표정이었다. 스파이더맨을 연호하는 거대한 함성의 한가운데 서서, 그는 창가에 선 누군가를 올려다보며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고취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온 세상을 구하고도 정작 자신은 낡은 단색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인파에 쏠려 다니는, 평범한 이웃 피터 파커로서.
길고 길었던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 들이, 마침내 하나의 진실로 맞물리는 순간이었다. 피터가 뒤늦게 그녀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핏기 없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어떠한 말도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기 전이었다. 조셀린은 제 깊은 곳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차오르는 확신과, 심장을 에는 듯한 안타까움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떨어질 것 같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의 멍든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떨리는 음성이 번져 나갔다.
“...Spider-Man?”
¹) small potato. 보잘것없고 사소한 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영어 관용 표현.
²) 밤이 꽤 깊어지다.
³)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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